예수님이 심판받으심 & 베드로의 부인 &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심

 

예수님께서 잡히심: 18 1-11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가신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셨던 곳으로 가룟 유다도 알고 있는 곳이다. (18:1-2)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들켜버린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고 자리를 뛰쳐나갔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서 그곳으로 왔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3) 군대와 아랫사람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던 가룟 유다가 아니었다면 장소를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사탄에 사로잡힌 가룟 유다의 인도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무기를 가지고 왔다. 마태복음 26 47절에는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당할 일을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18:4)

 

예수님께서 이제부터 당하실 고난과 고통을 안다고 하신다. 예수님의 아심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수님은 일어날 일들과 당신이 겪으실 고통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영화를 보시듯 실제 그대로 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수만 있다면 잔을 치워달라고 기도하셨을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아시고도 길로 스스로 걸어가신다.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시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없는 순종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난과 고통의 길을 걸으신 이유는 길이 죄로 죽은 사람들을 살릴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를 잡으러 자들에게내가 그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답하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진다. (18:6)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셔도 예수님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권세와 힘이 저들을 날려 스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지게 것이다. 이처럼 아무도 예수님을 잡을 없다. 예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을 피조물이 하늘과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스스로 결박당함을 허락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8:8-9)

 

예수님께서 자기를 잡으러 군대와 아랫사람들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고, 저들은 말씀의 권위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만 저들에게 끌려가시고 제자들은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 마태복음 26 56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도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겠는가? 예수님께서 순순히 잡히시는 것을 보며 자신들도 당연히 끌려갈 거라 겁을 먹었을 것이다. 다행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빠져나갈 있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것보다 자신들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피해 도망쳤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홀로 두고 사라진 제자들을 보시고 저들이 도망쳤다고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보내주신 자들을 명도 잃지 않으시려고 자신이 그들을 보호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도하셨던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가는 순간의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을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거듭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영생 가운데 당신과 함께 , 이미 완전해진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8:11)

 

예수님께서 잡히시게 되니 항상 예수님 곁에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던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꺼내 대제사장의 , 말고의 귀를 베어버린다. 베드로의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자신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것일까? 자신은 수제자로서 예수님을 지킬 있다는 자신감일까? 예수님은 절대로 죽으실 없는, 왕이 되실 거라는 믿음에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베드로의 다혈질적이며 충동적인 성격에서 비롯된 실수일까?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22 51절에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는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위해 행동임을 인정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야 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를 지켜주시기 위해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다. 예수님께서 참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잔을 마시는 순종이라고 알려주신다. 예수님께서 순순히 잡혀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자들은 모두 같은 공간에 있으며 서로를 상대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고 다른 이들은 사람으로 죄와 사탄의 거짓에 속한 일을 하고 있다.

 

안나스 앞에 서신 예수님: 18 12-14, 19-24

군대와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다. 당시 대제사장은 가야바이고 전직 대제사장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다. 가야바는 요한복음 11 50절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권고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죽여야 유대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치적인 표현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대속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8:12-14)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님께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에 관해 묻는다. 과연 안나스는 자신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에 대해 정말로 몰랐을까? 예수님께서 유명해지시기 시작하면서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 오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것들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가르치심으로는 예수님을 죽일 없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했다. 안나스는 정식 산헤드린 공회가 아닌 자기 집으로 예수를 끌고 와서 불법 심문을 하며 예수님의 대답 중에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죽일 있는 이유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안나스가 원했던 답이 아닌 도리어 안나스가 이상 심문을 이어가지 못하도록 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유대인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인 회당과 성전에서만 가르치셨고 은밀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하시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물어보라고 답하신다. (18: 19-21)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있던 아랫사람 사람이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라며 손으로 예수님을 친다. 이에 예수님께서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18:22-23) 예수님의 말씀에 안나스는 이상 심문을 이어가지 않고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낸다. (18:24)

예수님께서 안나스 앞에 끌려가셔서 당하신 일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안나스는 전직 대제사장이었고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기도 했기에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안나스는 권력을 이용해 예수님을 먼저 자기 집에 끌어와 불법으로 심문을 것이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심문을 당하시고 무고히 맞는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고 하나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보호하고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야 영적 지도자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어 죄를 짓기 위하여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는지 폭로한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8 15-18, 25-27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을 즐기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예수님이 결박을 당하고 끌려가시는 일이 벌어진다. 너무 놀라고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은 도망을 가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 사람이 끌려가신 예수님을 따라간다. 성경에는 다른 제자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정확히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한다. 베드로와 함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갔던 다른 제자는 마침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덕분에 베드로도 산헤드린 공회가 열리고 있는 대제사장 안으로 들어갈 있었다. (18:15-16)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8:17-18)

 

드디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번째 장면이 시작된다. 지키는 여종이 다른 제자 사도 요한의 부탁을 받고 베드로에게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게 해준다. 여종이 들어오는 베드로를 보며너도 사람의 제자 하나가 아니냐?”라고 묻는다. 여종이 그렇게 묻는 것은 아마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에 대해 문제로 삼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의 부탁을 받고 직접 문을 열어준 것을 보면 짐작할 있고너도~”라고 물은 것을 보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이미 알았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종의 질문에 베드로는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한다. 도망간 다른 제자들과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왔지만, 베드로의 마음 중심에도 도망간 제자들과 같은 두려움과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용기를 내어 대제사장의 집안까지 예수님을 따라왔으니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가?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제자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18:25)

 

베드로는 여종의 질문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번째로 부인한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직은 베드로의 마음에 요동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상황에서는 자신과 똑같이 답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다고는 상상도 하고 도리어 따뜻한 불에 몸을 녹이며 예수님의 심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기웃거렸을 것이다. 여전히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굳건한 충심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다시 한번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되고 베드로는 이번에도 부인하며 자신은 아니라고 답한다. 번째 같은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이제 마음이 거북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왠지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 같은 생각에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제사장의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부인하니 닭이 울더라 (18:26-27)

 

이제 이상 베드로가 빠져나갈 없는 확실한 증인이 나타나 번째로 베드로를 심문한다. 증인은 동산에서 베드로를 직접 사람이고 베드로가 귀를 자른 사람의 친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번째 부인한다. 베드로가 답하자마자 닭이 울고 울음소리가 베드로의 기억과 양심을 깨운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부인할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요한복음 13 3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거듭난 베드로가 당신을 위해 진정으로 목숨을 버리고 순교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옛사람으로는 자기가 고백한 어떤 것도 지킬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사람이 되는 과정을 통과하게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26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부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번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한 것으로,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한 것으로,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하고 부인한 것으로 나와 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가 점점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27절에닭이 울더라라고 끝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모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심히 통곡했다고 쓰여있다.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죽게 되셨는데 성경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시는 이야기 중간에 기록해 두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 안에서 친히 일하시는 것과 동시에 베드로 가운데서도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번씩이나 부인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일까? 베드로는 이상 수제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일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언제나 영적인 일을 하신다. 세상에 속해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일을 하신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시며 베드로는(제자들)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베드로는(제자들) 이미 거듭난 자가 되었음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제 영적 세계에 속한 자로,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영적 제자가 있도록 일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자신과 거짓 신념들과 죄로 가득한 자기 내면을 대면할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        베드로가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보고 절망하게 하셨다.

·        자신은 절대로 자신이 고백한 것들을 지킬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        영적 훈련을 받는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죄인지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죄로 죽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후에야 자신이 예수님께 장담했던 고백들과 행동들이 모래성과 같이 아무런 힘도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예수님을 번이나 부인한 자신을 대면하는 순간 베드로는 무너지고 절망했겠지만, 순간이 없이는 새사람이 없다. 거듭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로 죽었다는 사실과 자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죄들을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광야로 인도하신다. 광야에서 자신에게는 죽음 외에 아무런 소망도 없음을 철저히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구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생명을 낳는 제자가 되도록,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제자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께서 오신 후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깨닫고 이루게 된다.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18 28-40 & 19 1-16

다시 예수님의 심판 현장으로 돌아가서 보면 예수님께서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신 후에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재판소인 관정으로 끌려가신다. 가야바에게 밤새 심문을 받으시고 새벽이 돼서야 관정에 서신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해 더럽힘을 받지 않으려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기에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서 재판한다. (18:28) 빌라도가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를 묻자 고발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한다. 행악자는 헬라어 카코포이오스(kakopoios)’악을 행하는  또는 범죄자 뜻한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8:31-32)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론을 내리고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했다며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아 사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심판을 내렸다. (마태복음 26 63-68) 그럼에도 유대에는 사형법이 없기에 예수님을 로마 법대로 죽이기 위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법을 어기는 반사회적 범죄자라는 누명을 씌워 빌라도에게 고발한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을 왕이라 하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 32절의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시고 죽으시는 모든 과정은 유대 영적 지도자들과 빌라도에 의해서 저들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것도, 로봇처럼 조종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과 전능 가운데 창조 질서와 사람들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깨거나 침범하지 않으시면서 사람들의 속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다. 영이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개입은 절대적으로 공의와 사랑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를 없기에 사람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이 있을 없고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최선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셔서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것이다. 육의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아 죽이는 이야기만 보이지만 영적 눈을 뜨고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심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에 의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임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18:36)

 

빌라도가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불러 유대인의 왕인지 묻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빌라도 자신의 말인지 누구에게 듣고 하는 말인지 물으신다. (18:33) 마가복음 23 2절에 유대 영적 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칭 그리스도라고 한다며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기록이 나온다. 빌라도 역시 자신이 들었기에 질문했다고 밝히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했는지 다시 묻는다. (18:34-35)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지 답하지 않으시고 빌라도에게 진리에 대해, 예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시기에 유대인들에게 잡히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이 왕이신지 다시 묻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왕이시라고 답하신다. 예수님께서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시고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다. (18:37) 예수님의 말씀을 빌라도가 어떻게 받을 있을까? 예수님이 헛소리를 하는 정신병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아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부정할 없었고 예수님께서 진실을 말씀하시고 계심을 부인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하지만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빌라도의 마음은 없는 두려움을 넘어서 믿음으로 향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밖으로 나간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진심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유월절마다 사람을 풀어주는 전례대로 예수님을 풀어주기를 원하는지 유대인들에게 묻는다.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리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유대인을 선동하여 예수님이 아닌 강도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소리친다. (18:38-40)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19:4)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강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넘겨주어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다. 군인들이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혀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하며 예수님을 때린다. (19:1-3)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뀔까 하는 마음에 가시관을 쓰시고 머리와 몸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다시 유대인들 앞에 보이며 번째로 자신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머리와 온몸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으라고 소리 지른다. 빌라도가 번째 저들에게 자신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하며 예수님을 데려가 친히 박으라고 말한다. (19: 4-6) 그러자 유대인이 19 7절에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소리친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진리로 인해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아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빌라도는 말로 인해 더욱 두려워진다. (19:8) 유대 영적 지도자들과 빌라도의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크다 하시니라 (19: 10-11)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어디로부터 왔는지 묻지만,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예수님을 놓아줄 권한이 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권한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도록 내어주게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빌라도보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의 죄가 크다고 하신다. 유대 영적 지도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는 최종 판결을 내리는 죄를 짓게 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한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세력을 지키기 위해 없으신 예수님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는 죄는 유대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힘썼지만, 유대 영적 지도자들이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고 하며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라고 고소하며 그런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소리 지르며 빌라도를 몰아붙인다. 이에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다시 한번 예수님을 너희 왕이라고 하며 유대인들에게 보인다. 유대인들이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 지르고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박으랴?”라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는 대제사장들의 대답을 듣고 빌라도가 사형선고를 내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도록 내어준다. (19:12-16)

사도 요한은 빌라도의 재판에 대해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상세히 기록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빌라도의 마음과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빌라도의 모습을 기록했다. 예수님께서 유대 영적 지도자들의 죄가 크다고 하신 말씀까지 기록하면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도록 넘겨준 마지막 심판자였지만 실제로 빌라도를 압박하고 이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은 자들은 유대 영적 지도자들임을 확실히 밝히려는 것이다.

 

십자가에 박히신 예수님: 19 17-37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골고다)이라는 곳으로 가셔서 좌우편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박히신다. 빌라도가 나세렛 예수 유대인의 이라고 직접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인다. 많은 유대인이 읽으니,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자칭 유대인의 이라고 써달라고 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것을 썼다라고 하며 거절한다. (19: 17-22) 빌라도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것을 있었고 예수님의 영적 권위 앞에 두려운 마음을 느꼈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왕이라고 대답하신 대로 손수 패를 썼을 것이다.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진짜 왕이신 예수님에게 자칭 유대인의 이라는 거짓 이름을 달아주고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빌라도를 사용하셔서 예수님이 왕이심을 나타내셨다.

19 23-37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과정 가지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이루어진 일이라고 사도 요한이 번이나 밝히고 있다. 실제로 전에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메시아의 고난에 대해 시편 22편에 기록하였으며 외에도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예언되었고, 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 그대로 고난받고 돌아가심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이심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사람들로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며 이것이 또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다.

번째 장면은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고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나눠 갖는 이야기이다. 겉옷은 4명의 군사가 가지씩 나누어 갖고 속옷은 통으로 짜여 나눌 수가 없자 제비를 뽑아 사람이 갖기로 한다. 시편 22 18절에 그들이 옷을 나누고 옷을 제비 뽑나이다라고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19:23-24)

번째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사람들이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니 예수님께서 받으신 후에 내가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장면이다. (19: 28-30)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받으시는 장면도 시편 22 15절과 시편 69 21절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신구약 전체의 모든 말씀이 완벽하게 이루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죄로 죽은 사람들의 죗값을 치르시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으시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있게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는 뜻이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완성 새로운 생명 역사의 시작임을 의미한다.

마지막 번째 장면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기 위해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군인들이 예수님의 좌우에 박힌 자들의 다리는 꺾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흐르게 함으로 성경이 응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19:31-37) 군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만 꺾지 않은 것은 시편 34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출애굽기 12 46절의 유월절 어린양 규례대로 뼈를 꺾지 말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19 35절에 자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물과 피를 쏟으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 사람들로 사건에 대해 믿게 한다.

요한복음은 육의 눈으로 있는 세상에 속한 것들이 아닌 영적 세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적인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영적 눈을 뜨고 있도록 인도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은 사탄이나 유대 영적 지도자들이나 빌라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19 25-27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영혼이 떠나가시기 전에 행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밑에 있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사도 요한을 아들이라 하시고 사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맡겨주신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신다.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부탁받은 일이기에 정확하게 기록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셨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칭하는 애칭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자녀들이 아가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길 원하시기에 사도 요한을 부르시고 그가 아가페 사랑을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여 가르치는 자가 되는 사명을 주셨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진정한 사랑의 사도가 되도록 훈련하시기 위해 피가 방울도 섞이지 않은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섬기고 사랑하도록 맡겨주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였을지라도 예수님의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며 평생을 모시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할 있다. 마리아와의 갈등, 사도 요한의 가족들과의 갈등 외에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아가 깨어지고 성숙한 성품을 이루는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복음 전도자로 활발히 사역을 펼칠 동안 사도 요한은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훈련을 받으며 자신과의 싸움을 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가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실천할 있는 사도가 되었다. 아가페 사랑을 가르치는 요한 1,2,3 서가 성경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마치 성경책의 결론 또는 구원받은 자들이 이루어야 마지막 단계를 알려주는 책처럼 배치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세상에 나가 사역하는 대신 오랜 시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의 교제를 했기 때문에 영적 세계의 비밀을 맡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할 있었을 것이다.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 19 38-42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19:4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리크리쯤이나 되는 몰약과 침향 섞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예수님을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이 소유하고 있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낸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히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을 받고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시며, 예수님께서 무덤에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 되도록 하셨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유한 공회원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예수님을 따르던 자고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만나 거듭남의 가르침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사용하셔서 저들로 그동안 두려움으로 숨기고 있던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장사하는 일에 순종하게 하셨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부요한 자들이었기에 장례를 치를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켰을지라도 그들은 가난했기에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장례까지도 친히 준비하시고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해서 일하시며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