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가 다시 살아남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영에 관하여
이번 11장에서 좀 더 깊이 묵상해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죄로 영이 죽고 육에만 속한 자가 되어 시간과 공간이 제한된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을 감싸고 펼쳐져 있는 영적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산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습득한 지식으로 지정의를 통과하는 사고 체계를 거치며 신념을 만들어 내고 그에 따른 가치를 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을 한다. 즉 한 사람의 인격이나 내면 체계가 모두 이 세상의 틀, 곧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이미 “죄”가 되었기에 그 안에는 영적 세계에 속한 “선”이나 “진리”가 있을 수 없고 그것들에 대해 깨달을 수조차 없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영적 진리와 단어들이 거듭난 자 안에 거하시며 교통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통해 영적 세계 곧 하나님 나라의 지식과 지혜로 해석되지 않을 때, 읽는 자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영이 죽은 상태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를 해도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그치고 이 세상의 도덕과 교훈을 얻는 것 이상으로 변화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거나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이루는 경건의 능력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해 주셨듯이 영이 깨어있지 않은 자들은 죄성에 따라 모든 것을 외모로 취하고 판단하기에 자신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굳게 믿는 신념들조차 실은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이기적인 마음과 자신의 유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치우친 판단에 따른 것이기에 참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영이 죽고 죄 된 육에 따라 사는 자들이 믿는다고 하는 그들의 “믿음” 역시 영적 세계와 연결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이 아니라서 참 진리에 근거하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이리저리 치우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죄로 인해 영적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죽음에 빠진 사람들의 영이 살아나서 세상이라는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영적 세계에 속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와 지식을 깨닫고 그 안에 사고하고 분별하며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분리를 가르치는 이단들의 거짓 교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영적이 된다는 것은 영혼육이 온전히 하나로 작용함으로 사람을 이루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과 질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영이 죽고 죄 된 혼에 의해 죄의 종노릇 하던 것에서 영이 살아나 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비로소 실제로 하나 되어 교제하며 성령님과 교통함을 통해 혼과 육이 영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 동안 성화를 통해 믿음의 결국 곧 죄 된 혼의 구원을 이루며(베드로전서 1장 9절) 점차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영에 관련된 진리에 대해 배우지도 못하고 스스로 깨닫지도 못해 무지하기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단 교리에 속아 이단에 빠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교회 성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영적 삶을 살지 못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지 못하며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봉사하고 사역을 해도 경건의 능력이나 성령 충만한 삶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영과 영적 세계와 성령님의 일하심을 무시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오해하면서 여전히 죄 된 세상에 갇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거짓 성도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신학교 교수님들, 그 외 영적 리더들 중에도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은 여전히 영이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영적 세계에 속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대화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동문서답 같을 때가 많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람들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대화할 때도 사람들과 예수님께서 그 단어를 이해하는 뜻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에 속해 사는 사람들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쳐주신다.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당시에는 깨달을 수 없지만 곧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진리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1)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
나사로와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주셨기에 예수님은 저들을 사랑하시며 저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저들 안에 믿음이 있음을 보셨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던 자이고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드느라 일손이 부족한 언니를 돕는 일도 뒤로한 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이야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섬기는 자이다. 나사로는 이 두 자매의 오빠 이자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병에 걸려서 죽고 장사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자이다. 예수님이 저들을 사랑하신 것뿐만 아니라 저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시는 것들을 보고, 가르치심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과 가깝게 교제하는 사이다.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자 동생들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나사로가 아프다고 소식을 전한다. 얼른 오셔서 고쳐 달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시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나사로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저들에게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같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심으로 사람들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이심을 믿게 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자신도 영광 받으실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 바로 가시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유대로 가신다. 제자들은 바로 얼마 전에 유대에서 예수님께서 돌에 맞으실 뻔했는데 다시 유대로 가시려는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할 때는 세상의 빛이 있어 밝으므로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행하려 할 때는 빛이 없는 밤에 다니는 것과 같아서 어두워 볼 수 없어 걸려 넘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지만 아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친히 보호하심으로 저들이 원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예수님을 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실족하는 자들은 왜 그럴까?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다가도 이런저런 죄로 갑자기 넘어지는 리더들과 크리스천들이 많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 일을 하다가 넘어지는 것은 아닐까? 출발은 성령님을 따라 순종했지만, 자신의 욕심에 끌려 성령님을 앞서 자기 뜻을 펼치다가 실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무슨 일을 하든 언제든지 성령님과 동행하며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어 실족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신 것을 본받아야 한다. 그럴 때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4-1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고, 예수님께서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신다. 이에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어 쉬는 것으로 알아듣고 곧 낫겠다고 한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영적 세계에 속한 말씀을 하시면 이해할 수 없기에 저들을 위해 나사로가 죽었다고 다시 말씀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고 깨우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나사로가 이 세상에 속한 육의 생명이 죽었을 뿐 영원한 죽음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 예수님께서 곧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깨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육신의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고 나사로가 부활할 것에 대해 상상도 할 수 없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 세상 언어의 뜻으로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그에게 가셨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도록 간청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신다면 그것도 모두에게 좋은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나사로가 병에서 낫는 것이 아닌 예수님으로 인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고 그것을 목격하는 자들과 그 소문을 듣는 모든 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시려고 나사로가 죽어 장사 되기까지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부활을 믿게 될 것으로 인해 기쁘다고 하신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6)
예수님께서 바로 전에 유대로 가시려는 것을 우려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겠다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생길 놀라운 일이 있을 거라는 암시도 주셨는데 그 말씀을 하시자마자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다. 실제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죽을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고 도리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도마의 이 말을,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지고서야 믿게 된 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번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도마는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름대로 믿음의 답을 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아직은 예수님과 영으로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마 역시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의 참 사도가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4-26)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 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그날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러 왔다. 저들이 이날 이 시간에 방문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목격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러 모으셨기 때문이다. 영적 눈이 떠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서 예수님께서 빨리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서운함과 원망 섞인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이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정말로 자신의 말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을 보자마자 오빠를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예수님께서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을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마르다의 믿음은 아직 영적 세계에 속한 믿음이 아니고 육에 속한 믿음이라 자신이 굳게 믿는 신념을 넘어서지 못한다. 어쩌면 마르다는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아 오빠가 죽어서 속상한 마음에 예수님을 원망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믿음은 여전하다는 것을 그저 좋은 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오빠가 다시 살아날 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마르다는 당연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가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그것을 안다고 답한다.
예수님은 다섯 번째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자신을 정의하신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부활이요 생명인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마르다는 믿는다고 답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마르다의 답이 어쩐지 꼭 들어맞지 않는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 진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육에 속한 자신의 한계 안에서 그 말씀을 이해하고 답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선명하게 설명해 주시는 두 단어이다. 부활은 누구에게 필요한가? 죽은 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또한 부활하기 위해 그리고 부활 후 영원히 다시 죽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생명이다. 자기들이 죄로 죽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시고 다시는 죽지 않을 생명,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저들의 죗값으로 내어주셔서 사람들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부활하게 하심으로 새 생명 가운데 영적 세계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기에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부활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하시며 마르다에게 그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25-26) 그곳에 모여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목격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겠다고 하신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는 말씀은 마르다 집에 모인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키시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죄로 이미 죽었기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마치면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으면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지지 않고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게 된다. 곧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어도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는 뜻은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의 영적 진리에 대해 지금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성령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 저들 가운데 이루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구원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심으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며 자신이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사람들로 알게 하여 자기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아날 거라고 하신 말씀을 믿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표적을 통해 보여주신 능력도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의 입으로 고백도 했지만, 여전히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자를 살리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다. 마르다의 믿음과 고백과 행동이 논리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다. 마르다의 믿음이 세상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닌 육에 속한 자신의 믿음이고 고백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3)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8)
마르다가 마리아를 부르니 마리아가 급히 나와 예수님을 만난다. 마리아가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울며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마리아와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시고 그 영이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신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많이 사랑하셨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어찌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냐고 한다. 예수님께서 낫게 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게 하시려고 일부러 늦게 오셨음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나사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은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며 말한다.
33절과 38절에 두 번이나 예수님께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시고 비통히 여기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는 것은 무엇일까? 불쌍히 여기시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병과 고난과 어려운 환경과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불행이며 저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절망시키는 원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영적 눈을 뜨고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것은 잘못된 신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병과 고난과 어려운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난과 고통과 절망을 주는 진짜 원인은 바로 “죄”이다. 죽은 나사로를 인해 슬피 우는 마리아와 마르다 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실제로 울어야 하는 것은 죄로 인해 죽은 나사로와 자기들의 비참함 때문이다.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으로 인해 울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 비참함을 해결할 길이 없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비통히 여기시는 것이다. 죄로 죽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저들의 비참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선포하시는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생명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며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사탄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저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비통해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곧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나사로의 죽음 앞에 마음 아파하며 슬피 우는 사랑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39)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시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시며 믿느냐고 마르다에게 물으셨을 때 (25-26) 마르다가 믿는다고 하며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니 시체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서 안 된다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다. 마르다의 행동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또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고백이 참믿음의 고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르다는 자신이 말하는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신지 어떤 능력이 있으신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아직 영이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르다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믿음 역시 마르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저들의 믿음은 영적 세계와 단절된 그저 육에 속한 믿음인 것이다. 영이 살아나서 영적 세계에 속해 영적 진리 가운데 영적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죄로 죽은 이 세상에 그것을 가능케 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0-42)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는 말씀에 마르다가 막아서자,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옮겨 무덤이 열리도록 한다.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커녕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일조차 막아버리는 죄인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친히 오셔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로 그것을 보게 하신다. 저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하신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매일의 삶 가운데 지금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시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항상 하시듯이 가장 먼저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으로 인해 자신을 높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높이시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높이시며 영광 받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이유는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표적을 행하심으로 영적 세계의 능력이 이 세상에 임하게 하시고 사람들로 영적 세계를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본질이 되는 믿음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3-44)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부르신다. 잠시 후에 나사로가 온몸과 얼굴이 싸여진 채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다! 이 광경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에 비명과 환호와 함성이 그곳을 덮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이심이 분명하다! 어떻게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이미 살이 썩어 냄새가 나는 시체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놀라며 감격해서 절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지 않았을까? 죽은 나사로를 다시 만난 기쁨에 모두 소리치지 않았을까? 얼마나 큰 감격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그곳이 요동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죽은 나사로를 부르시는 모습이 앞서 말씀하셨듯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잠자던 자를 깨우시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 죽었지만, 아직 영원한 죽음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죽음 안에 잠을 자는 것과 같아서 다시 살아날 기회가 있다.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다하기 전에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생명으로 살아나면 죄의 삯인 영원한 형벌 곧 영원한 죽음에서 자유를 얻게 될 수 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고린도전서 15장 20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로 예수님과 같이 그의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음이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들에게 선포된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복음이 선포되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자유롭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벗겨주고 온몸을 싸고 있던 베를 풀어주고서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죄로 죽은 사람들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후의 영적인 모습이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와 같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새 생명과 새 삶은 얻은 크리스천들이 하루아침에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고 완벽한 삶을 살게 되지 않는다. 여전히 죄를 짓고 계속해서 구원받기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기도 한다. 그것은 죄에 대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했거나 복음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벗어버려야 할 수건이 아직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후에 죄 된 혼과 육의 정욕과 죄성에 따라 사는 것을 멈추고 영에 깨어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진리의 말씀이 온몸을 싸고 있는 죄로 만들어진 거짓 신념들과 가치들을 하나하나 벗겨가면서 죄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 되면서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된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나사로의 몸을 싸고 있는 천을 예수님께서 벗겨주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벗겨주라고 하신 것이다. 무슨 뜻일까? 나사로가 스스로 할 수 없고 누군가 나사로의 몸을 싸고 있는 천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것을 벗겨줄 때 나사로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는 것이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주신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죄를 벗겨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스스로는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죄를 공동체가 서로 보게 해주고 회개하도록 도울 때 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함께 죄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구원받았다고 해도 단번에 자신의 모든 죄를 깨닫지 못한다. 구원받은 후에 성령님을 따라 살며 성화를 이루는 중에 죄라고 깨닫지도 못하며 붙잡고 사는 거짓 신념들과 세상에 속한 가치들이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관계를 맺고 함께 삶을 나누며 사는 동안 드러나게 되고 비로소 회개하는, 반복된 믿음의 여정을 통해 점점 더 죄에서 떠나며 거짓 신념을 버리고 진리를 신념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7-48)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본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린다. 대제사장들이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신 놀라운 표적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죽은 나사로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회를 열어,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지 모의를 한다.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누구신지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선한 일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들에 대해 공의롭고 의로운 판단을 할 수 없다. 저들은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적 눈먼 자들이 되어서 자기들뿐만이 아니라 저들을 따르는 자들까지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죄인인 예수를 유대인들이 믿게 되는 것을 막고, 로마로부터 유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정당한 이유를 들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과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시고 폭로하시는 것과 자신들이 차지하고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도전받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 것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0-52)
유대인들과 영적 지도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고 계신다. 영이 살아나 영적 세계에 속하게 되면 겉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금씩 알 수 있게 된다. 거듭난 자들은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성령님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도 깨닫게 되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영적 지도자들 무리 가운데 대제사장 가야바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유대민족은 물론 열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셔서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실 것을 미리 말하게 하신다. 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모의를 하고 예수님을 자신들 뜻대로 죽인다고 착각하지만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의 죽음은 저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순종의 일임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가야바의 말처럼 저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56-57)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의한 것을 아시고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다. 다시 유월절이 돌아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님을 찾으며 예수님께서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에 나타나실지 서로에게 묻는다. 이미 모든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있는 곳을 알려서 예수님을 잡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죽음에서 부활하며 영생을 살 수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싶은 사람들을 가로막고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며 순종하는 영적 삶을 자신들이 먼저 살며 증인이 되지 않는다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지었던 똑같은 죄를 짓게 될 것이다.